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셀레우코스 2세]], [[셀레우코스 3세]]: 멸망의 위기에 놓인 제국 === [[파일:터키 지중해.jpg|width=800]] 3차 시리아 전쟁의 결과, 이집트에 지중해 해안 대부분을 상실하고 내륙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라오디케 1세는 자기 아들 셀레우코스를 '셀레우코스 2세'로 선포하고 소아시아에서 거병했다. 베레니케는 오빠였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미 사망했다.]에게 구원을 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출진하여 시리아로 행진했다. 그러나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누이 베레니케와 어린 외조카 안티오코스가 이미 라오디케 1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격노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기로 작정했다. 기원전 246년에서 245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이오니아,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 원정하여 여러 해안 도시를 공략하거나 복속시켰다. 에페소스 총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육군은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의 지휘하에 시리아를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 셀레우키아를 거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안티오키아까지 함락시켰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셀레우코스 2세가 도망친 바빌론을 향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진격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리스어로 쓴 승전비에는 그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엘람,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박트리아까지 정복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모든 신성한 물건들"을 되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이집트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까지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제 멸망을 목전에 두는 듯했지만,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이 안드로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을 격파하며 키를라데스 제도를 함락시키고,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회군하면서 가까스로 멸망을 모면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4년, 셀레우코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안티오키아를 탈환했고 기원전 242년 시리아 북부의 내륙 지대를 탈환했으며, 다마스쿠스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휴전을 제의했고, 기원전 241년 양국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때 라오디케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넘겨졌고, 얼마 안가 처형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41년, 소아시아의 왕으로 삼아뒀던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기원전 246년경 어머니 라오디케 1세의 부추김에 따라 형에게 소아시아의 소유권을 요구했다. 바빌론을 잃을 위기에 몰려 있었던 셀레우코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은 셀레우코스 2세는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기원전 240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갈라티아]]의 [[켈트족]]과 동맹을 맺고 앙카라 인근에서 셀레우코스 2세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히에락스는 켈트족을 물리친 후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현실을 인정하여 기원전 236년 히에락스와 화평을 맺고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모든 소아시아 영토를 할양했다. 형제간의 내전이 벌어진 사이, 제국 각지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기원전 238년,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는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실상 왕으로 군림하다가 유목민족인 파르니족의 지도자 [[아르사케스 1세]]의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기원전 237년, 아르사케스 1세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하여 새 수도로 삼고, 그 주변의 영토들을 공략했다. 셀레우코스 2세는 파르니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제 동방 영토를 되찾을 힘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박트리아에 군림하던 디오도토스 2세는 자신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으로 선포하고 기원전 235년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편, 소아시아에서는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의 위세가 나날이 쇠락했다.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는 히에락스를 상대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28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히에락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를 차지하길 희망하면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2세는 원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있었고, 바빌로니아에서 히에락스를 몰아냈다. 히에락스는 소아시아로 도망친 뒤, 다시 트라키아로 도주했다가 기원전 227년 켈트족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2세의 치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25년 12월 말에서 낙마하여 죽어버린 것이다. 그 후 왕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3세]]는 소아시아를 잠식하고 있는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와 맞서고자 소아시아로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먼저 삼촌 안드로마코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보냈지만, 그는 아탈로스 1세에게 패한 뒤 생포된 후 이집트로 보내졌다. 이후 셀레우코스 3세가 친정에 나섰지만, 기원전 223년 4월 또는 6월 [[켈트족]] 출신의 아파투리오스와 공모한 장교 니카노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후 동생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했지만, 권신 헤르미아스가 정권을 잡자 아카이오스 2세, 몰론, 알렉산드로스가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제국은 건국한지 90년만에 붕괴될 위기에 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